한번구원 영원구원 교리는 성경말씀을 오해한 교리

로마서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말씀을 이용해서 한번구원은 영원한구원이라고 성경를 오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을 다시한번 잘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라는 전제가 적용됩니다. 한번구원 영원구원이라고 믿고 한번구원받았으니까 남은 생을 내맘대로 사는것이 예수안에 사는것인가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절). “이제”라는 것은 지금 나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다음 구절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정죄”는 헬라어로 ‘카타크리마’, 즉 ‘형벌’,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필경 형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정죄함이 없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법 곧 생명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법, 즉 사망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법이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에게 형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법이 사망의 법을 ‘폐지’한다고 하지 않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죄의 법, 사망의 법은 여전히 이 땅에서 효력을 미치며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사망의 법이 아무리 흥왕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홍해바다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생명의 바다, 구원의 바다이지만, 애굽 군대가 홍해를 지날 때는 죽음의 바다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향했기 때문에 생명의 법이 그들을 지키지만,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졌기 때문에 사망의 법에 따라 심판의 형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나팔꽃이 흔들림과 떨림을 통해 줄을 타고 올라가듯이, 우리는 갈등을 겪으며 더욱 성화된 삶으로 나아갑니다. 같은 갈등도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삶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은 각각 새와 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돌을 아무리 세게 하늘로 던져도, 돌은 금세 떨어지고 맙니다. 돌은 새처럼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위와 명예가 높은 사람은 겉으로는 멋지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죄의 법에 묶여 있는 한 결국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이내 추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순간, 성령의 법이 우리를 끌어올려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하여 반드시 형벌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3절이 답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의를 알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육신에 죄를 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찢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의 법의 고발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분이 흘리신 고통의 피는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킨 능력의 보혈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사탄의 공격을 버텨 낼 재간이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육신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영’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야기할 때 ‘육신’은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인간의 몸, 즉 살을 의미합니다. 둘째,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을 의미합니다. 셋째,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육신을 따르지 않는 삶이란, 자신을 좇지 않는 삶,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직 육신을 입고 사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법에 묶여 생명의 법을 따라 살 수 있습니까? 성령님을 따름으로 가능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권면하십니다. 때론 친구를 통해, 자녀를 통해, 설교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십니다. 
  
율법의 요구는 언제나 온전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일까’ 스스로 묻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도(正道)를 걷고자 힘쓰고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뜻이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거짓말을 해야 나에게 더유리한 상황이 왔습니다. 그게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일까?” 하며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령님의 목소리를 느꼈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그런 메시지를 주셨을 때, 거부했더라면 정죄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법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법에 묶입니다.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갑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법에 묶여 있는 한 주님께서 의로 채워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찾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시므로 정직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정직한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한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순간, 정직한 삶에 관한 율법이 완성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율법에 매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한, 우리의 수준에서 깨닫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의로 채워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성령님의 말씀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결코 침범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바로 그 순간부터 열매 맺힌다는 사실입니다.